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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대통령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 생애

by 박스좋아하는고양이 2021.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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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는 현재까지 군인, 정치인, 독재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중동전쟁 당시 이집트의 국가적 영웅이었지만 대통령이 된 이후 독재자가 되어 거의 30년 간의 독재정권 끝에 마침내 국민들의 마음을 끌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독재자가 된 영웅들 중 한 명입니다.

 

-목차-

1. 생애 및 군인 시절

2. 대통령 취임

3. 독재와 몰락

 

1. 생애 및 군인 시설

  • 생애

그는 무와피에 있는 카불 엘 무슬림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상하게도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도 모노피아 출신입니다. 아버지는 중소기업을 운영하셨고 모노피아에 잇는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던 현지 매니저도 계셨습니다. 원래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카이로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1948년 중동 전쟁으로 인해 무바라크의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원래 아랍권에서는 명문가 자녀들만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이스라엘이 완전히 탄압받자 중산층도 사관학교 입학의 물꼬를 텄습니다.

  • 군인 시설

무바라크는 공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조종사의 길을 갔습니다. 1949년 공군학교를 졸업하고 시나이 반도에서 조종사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1950년대에 소련에서 공부했고 최신 전투기 조종 기술과 비행 전략을 공부했습니다. 1967년 칼루 비아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제3차 중동 전쟁 때 파괴된 이집트 공군을 재건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공군 재건을 단 2년 만에 완료해 4년이 걸릴 것을 더 빨리 끝냈습니다. 그는 뛰어난 실력 덕분에 나세르 대통령 휘하에서 공군참모총장으로 진급했습니다. 그는 그 후 공군 사령관과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2. 대통령 취임

1981년 안와르 사다트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쿠타를 없애고 대통령직을 이어받았습니다. 무바라크 자신은 쿠데타에서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부상을 입어 치료를 받았습니다. 외교 용어는 요르단,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의 사다트 두 나라의 친미, 이스라엘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서로가 윈-윈 하는 상황이었으며, 이스라엘은 골란고원 인근에서 시리아와 충돌하는 이집트에 대한 쌍방 전선을 피할 수 있었고 2000년 팔레스타인이 이집트 국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미국과 화해해 이집트 정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대통령-호스니-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자비로운 봉기로 상을 받은 이집트의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며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외쳤습니다. 무바라크는 "우리나 시나이 반도를 해방했을 때 당신은 앞유리를 착용하고 있었다." , "당신은 정말로 그 전쟁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나요?"라고 비판하였습니다. 게다가 무바라크는 2006년 이스라엘이 레바논 남부에서 전쟁을 벌였을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또 가자지구에 대한 공습 당시 이스라엘을 비난했고,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의 공습에 발포할 것은 명령했으며, 그들의 통행을 막았습니다. 그는 팔레스타인, 아랍 세계, 이집트에서 심각한 비난을 받고 있는 가자 지구를 공격하고 있는 이스라엘 군대에도 식량을 보냈습니다.

  • 가자지구에 있는 굴을 거래하러 온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관세만 받아들이고 굴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3. 독재와 몰락

  • 독재

무바라크 통치 기간 동안 경제 성장, 문명과 같은 문제들이 부분적으로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그 돈의 대부분은 군사, 정치, 사업과 같은 소위 특권에만 지급되었고, 이집트인의 약 40%가 하루에 2달러도 안 되는 매우 가난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무슬림 형제들을 포함한 야당을 잔인하게 탄압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여러 차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의해 처단을 당하려고 했지만 사다트와 달리 실패하고 통치를 계속했지만, 사임하고 싶지 않았고 차남 카말 무바라크에게 자신이 서자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몰락

2011년 튀니지 혁명에 고무된 이집트 국민들은 무바라크 철수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2011년 1월 시위대 철수 요구를 거부하고 여러 명이 전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고, 군대는 군사적 탄압을 거부하였습니다. 무바라크는 2011년 9월 대선에 출마하고 싶지 않다며, 그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군부와 서방이 무바라크에게 밀어붙였습니다. 일각에서는 무바라크가 군부가 일시적으로 재배치됐기 때문에 귀국을 거부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깨어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물에 잠길 것이라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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